믿음으로 가는 생활

낮아짐과 비움

dogwoodz 2007. 6. 15. 09:54

 

낮아짐과 비움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지만,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경배했던 사람은 소수의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주님의 모습을 연상하며 기다립니까? 금빛 나는 하늘의 쌍마차를 타고,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나타나는 주님의 모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까? 2천년 전이나 오늘이나 세상적인 평화에 물든 사람들은 모두 이런 휘황찬란한 모습의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런 주님의 모습을 말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천하고 추하여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구유에 누인 그 모습이 구세주의 표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한국의 대표적인 반체제 시인으로 김 지하님이 있습니다. 그의 유명한 작품 중에 ‘금관의 예수’라고 하는 희곡이 있습니다. 그는 이 ‘금관의 예수’라는 작품을 통해 오늘날의 현대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목사와 신부, 그리고 문둥이와 거지, 창녀를 주인공으로 등장을 시켜 오늘날의 교회가 예수님 머리에 무거운 금관을 씌워 너무 무겁게 만듦으로 죽은 동상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합니다. 원래, 예수님은 성경에 있는 대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위해 오셨는데, 교회가 예수님의 삶을 종교라는 미명 하에 하나의 예식으로 묶고,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미명 하에 인간들의 언어 속에 가둬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 가운데 다시 오셨는데 이를 다시 이번에는 가시 면류관이 아니라 휘황찬란한 무거운 금관을 씌워 다시 못 박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속에서 없는 자들의 편에 서서 일하셨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가진 자들 편에 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불의가 판을 치고, 가난한 자들이 헐벗고 추위에 떠는 대도, 교회는 종탑만 높이 쌓아 올리고는 무거운 금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예수님의 동상 앞에서 자기들만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니 내가 만들어 버린 예수님의 모습 입니다.

구원의 소식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들려지지만 구원의 기쁨은 누구나 얻는 것은 아닙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과거의 세상적 평화를 추구하던 것을 회개하고 하늘의 빈마음의 평화를 추구한 사람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겠습니다. 그리고 남을 속였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이전의 삭개오는 남 보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자기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알았지만,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그 보다 더욱 중요한 삶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라고 하는 내면의 가치였습니다. 가진 것으로 평가하는 세상 가치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죄인 된 자기를 인정하고 낮아져서 자신을 비움으로 풍성해지는 하늘의 가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 나눌수록 우리의 마음은 점점 풍성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손을 움켜지고 있는 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무언가를 주시고 싶어도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손을 펼 때,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 무언가를 우리 손에 쥐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눔으로 저 어두운 거리, 저 캄캄한 거리에 빛을 가져다주고, 저 쓸쓸한 거리, 차가운 거리에 따뜻함을 전하는 이웃의 향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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